[정규재 칼럼] 두려워 떠는 자(者)들의 평화

입력 2016-07-25 18:42  

노예의 굴종을 평화라 할수없다
목숨걸고 맞서본 적 없어서인가…
헌법의 통일은 오로지 자유통일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



정세균 국회의장은 연설을 잘하는 분이 아니다. 소박 다정해서 굳이 문장의 미려함에 기대지 않는 덕성이 있다는 평이다. 지난 17일 제헌절 기념사도 그랬다. 기념사는 헌법을 강조하는 평범한 문장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아뿔싸. ‘통일’ 문제를 언급하면서 연설은 궤도를 이탈했다. “헌법은 평화적 통일을 요구하고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 그러나 헌법이 규정하는 통일은 자유통일이지 평화통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평화통일을 원한다’고 말하는 것과 ‘평화통일이 헌법정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르다. 헌법 제4조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을 말하고 있다. 적대적 대결이나 무력 행사만 없다면 충족되는 그런 통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의한 통일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본으로 하는 민족국가를 한반도에 걸쳐 완성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어서 다른 어떤 보완적 해석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헌법의 통일은 북한의 공산독재와 양립할 수 없다. 당연히 두 개 이념국가를 전제로 하는 연방제 따위도 배척된다.

연설 후단부에 “가장 정의롭지 못한 평화라도 가장 정의로운 전쟁보다 낫다”는 필요 없는 말이 끼어들었다. 정 의장의 소박한 언어 중에 그래도 멋을 부린 부분이 아쉽게도 실언이 되고 말았다. 문맥상 사드를 배치해 만일의 전쟁에 대비하는 것이 무장해제보다 못하다는 뜻이냐는 반론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북한 핵문제 앞에서 ‘전쟁보다 나은 불의한 평화’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전쟁의 부재(不在), 즉 노예의 평화가 자유인의 고뇌나 역경보다 낫다고 생각한다면 국가는 존재할 가치가 없다. 자연인은 자신만의 평화를 찾으면 그뿐이다. 그러나 국가는 그럴 수 없다.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새누리당 21명 의원의 명단에서 김광림 최경환 등의 이름을 봐야 하는 것은 실로 유감이다. 더구나 깃발만 꼽으면 당선되는 지역에서의 너무도 가벼운 배신이다. 국가안보를 알량한 보상금이나 몇 장의 표로 치환하려는 필사적 노력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민족의 주인은 사라지고 객들만 모여앉아 전쟁 없는 평화를 넋두리하는 꼴이 됐다. 회고하건대 한국 정치를 규정하는 이런 비겁함은 뼈에 새겨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외세에 가위눌려 벌벌 떨며 지낸 지난 수백년 동안 피에 새겨진 역사 말이다.

무신난 이후 단 한 번도 목숨 걸고 싸운 적이 없는 영혼 부재의 지배층이었다. 적들의 진격로가 된다고 도로를 닦을 수 없고, 지도조차 만들지 못했다. 부국강병은 침략을 부를지 모르기 때문에 거부됐다. 그래서 백성은 가난에 찌들었고 양반들은 백성의 마지막 기름 한 방울까지 오직 내부에서만 쥐어짜야 했다. 김성일은 사회 혼란이 우려된다는 핑계로 일본은 침략의사가 없다고까지 거짓말을 했다. 병자호란 때는 모두가 먼저 달아나기를 경주하듯 했고, 양반들의 가혹한 토색질에 백성들은 오로지 피해자로서만 숨죽여 살아왔다. 국민이 주인이라는 작금의 민주주의 체제에서조차 주인의 책무를 말하는 자가 없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모두가 어떤 명목이건 국가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준비만 하고 있는 피해의식의 사회처럼 보일 정도다.

식민지로 전락하면서도 저항의 전쟁 한 번 치러내지 못했고 해방조차 미국이 피흘려 싸운 결과로 주어졌다. 주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히 돌려받은 것에 감사할 줄 모르고, 심지어 자신의 전쟁조차 타인이 대신하는 가치전도가 목격되고 있다. 그러니 사드 하나로 저토록 겁에 질려 벌벌 떠는 것이다. 조선 후기 ‘소중화 사대의식’이라는 것도 비열성을 덮는 관념의 위장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명나라 은혜에 보답한다며 만동묘와 대보단을 만들어, 그것도 야밤을 틈타 제사를 지내는, 죽은 주자학의 좀비가 되어갔던 것이다. 세월은 흘렀지만 민주국가의 주인 노릇하는 그런 정치는 아직 없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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